메뉴 건너뛰기

[2009-45] 세례와 성찬

관리자 2009.11.07 23:01 조회 수 : 5526 추천:26

기독교에는 두 가지 예식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두 가지 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물론 가장 큰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크게 비유하여 보면 말씀과 기도는 보이지 않는 말씀이요, 세례와 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을 예전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이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주님은 눈에 보이는 예전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말씀 선포와 성례전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순교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한 것은 바로 그들 안에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끈끈한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표현되는 예식이 바로 세례와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도하여 새로운 교우가 오면 반드시 복음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한 공동체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하나의 공동체와 가족이 된 것을 확인하는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복음 전파와 더불어 세례와 성찬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세교회가 타락하여 이 균형은 깨어지면서 성례전으로 치우치기 시작했습니다. 즉 말씀 선포는 없고 예전만 있는 것입니다. 음악과 장식, 예식의 형식만 있는 예배가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는 이 불균형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개혁하였습니다. 바른 예배는 말씀과 성례, 이 두 가지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로 중세가 너무 예전 중심으로 갔다면 현대는 말씀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칼빈보다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는 한국교회는 성례전이 거의 없는 예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례전이 일 년에 한두 번 형식으로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형식으로서의 예전이 아니라 강력한 은혜의 수단으로서 예전을 우리가 누려야 합니다.

보이는 말씀인 예전의 유익은 말씀이 실감나는데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죽으셨다는 사실을  머리로 느낄 때는 분명하지 않는데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떡을 직접 입에 넣고 씹음으로 정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입에 넣고 마심으로 촉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나 생명나무도 성례입니다. 눈으로 보고 직접 먹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성막이나 제사제도도 성례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구약의 예표는 십자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새로운 언약인 성찬만 지키게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장차 우리가 하늘나라의 포도주로 주님과 교제할 것을 기다리는 준비가 되게 하였습니다. 성찬은 선명히 눈으로 보고 직접 손으로 만져 보는 은혜입니다.

세례와 성찬이라는 이 두 가지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교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하며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그 두 가지 중에 세례는 출생에 비유합니다. 세례는 믿음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출생이후 계속되는 믿음의 생활 속에서 잊어버리기 쉬운 부분을 주님은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성례주일을 통하여 진정 깊은 주님과의 연합을 실감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