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일 오전 8시 40분 온누리 교회 담임목사인 하용조목사님이 6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8월 1일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별세했습니다. 그의 급작스런 소천은 가족들과 온누리 교회 성도들의 슬픔이 크겠지만 한국교계도 지도자 한분을 잃었습니다. 한국교회로서는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 9월에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신지 1년이 못되었는데 이어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성경적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지향하며 오늘의 온누리 교회를 대형교회로 일구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9라는 표어로 세계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두란노서원이라는 것을 세워 한국교회 기독교 문서사역에 큰일을 하였습니다. 근간에는 CGN TV를 만들어 방송선교도 하였습니다. 유명한 것은 아버지 학교 등 기독교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국교회를 섬기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저는 2일 오전 그 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한참이나 일에 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사역자로서 걸으며 항상 그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분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사역을 시작한 젊은 시절 내내 그는 항상 제 앞에 보이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늘 꿈을 이야기 하였고, 그 꿈을 이루는 무언가를 항상 한국교회에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담임하는 온누리 교회와 또 그가 만든 두란노 서원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보니 제가 지금도 늘 들고 다니면서 묵상하는 생명의 삶이라는 책이 바로 그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보니 제 서재에 두란노 서원의 책이 삼분의 일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찬양과 경배 운동도 80년대 후반부터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것이나 교단의 틀에 매이지 않고 신선한 방법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 안에 끌어 들이고 전도하는 일에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직접 장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는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CGN TV를 통해 그의 천국환송예배(발인예배)와 하관예배실황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를 가장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그가 가는 마지막 장례식에서 그를 어떻게 추억하는 것은 그분의 삶의 열매이기도 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장례 절차가 형식적인 슬픔을 뛰어 넘는 한편의 부흥회 같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죽어서도 그는 산 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살아서의 삶이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되고 메시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가까이 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름다운 사람, 꿈에 사로잡힌 사람, 단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목사님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추억하고 기억하고 있느냐가 바로 삶의 열매입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겠지만요. 다시한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가 가슴 깊게 새겨집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 앞에 서는 날“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그렇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고(故) 하용조 목사님!, 주님 품에 안식하시고 유족들에게 주의 위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저는 2일 오전 그 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한참이나 일에 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사역자로서 걸으며 항상 그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분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사역을 시작한 젊은 시절 내내 그는 항상 제 앞에 보이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늘 꿈을 이야기 하였고, 그 꿈을 이루는 무언가를 항상 한국교회에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담임하는 온누리 교회와 또 그가 만든 두란노 서원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보니 제가 지금도 늘 들고 다니면서 묵상하는 생명의 삶이라는 책이 바로 그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보니 제 서재에 두란노 서원의 책이 삼분의 일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편화 되었지만 찬양과 경배 운동도 80년대 후반부터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것이나 교단의 틀에 매이지 않고 신선한 방법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 안에 끌어 들이고 전도하는 일에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직접 장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는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CGN TV를 통해 그의 천국환송예배(발인예배)와 하관예배실황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를 가장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그가 가는 마지막 장례식에서 그를 어떻게 추억하는 것은 그분의 삶의 열매이기도 한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장례 절차가 형식적인 슬픔을 뛰어 넘는 한편의 부흥회 같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죽어서도 그는 산 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살아서의 삶이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되고 메시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가까이 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름다운 사람, 꿈에 사로잡힌 사람, 단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목사님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추억하고 기억하고 있느냐가 바로 삶의 열매입니다. 물론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겠지만요. 다시한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가 가슴 깊게 새겨집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 앞에 서는 날“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그렇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고(故) 하용조 목사님!, 주님 품에 안식하시고 유족들에게 주의 위로가 넘치길 기도합니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566 | [2019-06-09] 세상에 나 혼자라고 생각될 때 | 이몽식 | 2019.06.09 | 936 |
1565 | [2019-06-02] 붉은 장미 | 이몽식 | 2019.06.03 | 934 |
1564 | [2019-05-26] 부부(夫婦) | 이몽식 | 2019.05.26 | 963 |
1563 | [2019-05-19] 주님이 세우신 목자들 | 이몽식 | 2019.05.19 | 895 |
1562 | [2019-05-12] 어머니의 사랑 표현 | 이몽식 | 2019.05.12 | 844 |
1561 | [2019-05-05] 아빠의 기도(祈禱) | 이몽식 | 2019.05.05 | 884 |
1560 | [2019-04-28] 하나님 나라 백성 | 이몽식 | 2019.04.28 | 1136 |
1559 | [2019-04-21] 부활의 아침에 | 이몽식 | 2019.04.21 | 869 |
1558 | [2019-04-14] 내가 죽은 십자가 | 이몽식 | 2019.04.14 | 881 |
1557 | [2019-04-07] 교회의 새 이름 이스라엘 | 이몽식 | 2019.04.09 | 918 |
1556 | [2019-03-31] 내시경 시술 | 이몽식 | 2019.03.31 | 1022 |
1555 | [2019-03-24] 이 봄비 그치면 | 이몽식 | 2019.03.24 | 1382 |
1554 | [2019-03-17] 봄비 | 이몽식 | 2019.03.17 | 956 |
1553 | [2019-03-10] 내 마음에 살아오는 봄 | 이몽식 | 2019.03.10 | 934 |
1552 | [2019-03-03] 봄이 오는 길목 | 이몽식 | 2019.03.03 | 878 |
1551 | [2019-02-24] 다음세대를 위한 기도 | 이몽식 | 2019.02.24 | 1247 |
1550 | [2019-02-17] 눈 내리는 날에 | 이몽식 | 2019.02.17 | 995 |
1549 | [2019-02-10] 침묵(沈黙) | 이몽식 | 2019.02.10 | 1052 |
1548 | [2019-02-03] 나만 아는 숲길 | 이몽식 | 2019.02.03 | 1114 |
1547 | [2019-01-27] 창조의 목적 | 이몽식 | 2019.01.27 | 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