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일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은퇴하시고는 일선에서 물러나 말년에 남한산성에 머무셨습니다. 당시 젊은 목사님 몇 분이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고는 젊은 목회자인 자신들을 위해서 할 말씀 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한경직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목사님들, 예수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배 목회자로서 목회에 대한 조언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씀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그곳에 찾아온 젊은 목회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생각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총신대학과 신대원을 다닐 때 교실마다 붙어 있는 교훈이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납니다.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저는 선지동산에서 이 다섯 가지 교훈을 생각하면서 10여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신자가 되라’는 말씀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총신대학에 들어올 정도면 이미 신자가 되어서 들어온 것인데 또 ‘신자가 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깊이 마음에 들어오는 교훈이 바로 ‘신자가 되라’는 말씀의 의미가 자꾸 되새겨 집니다.

위에서 말한 예수를 잘 믿고, 신자가 된다는 말은 단순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만 그치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도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책망이 귓전에 강하게 울렸습니다. 즉 예수를 믿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믿음이 작동되지 않는 삶을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사로가 병들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고쳐 주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웬지 예수님이 늑장을 부려서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첫마디가 예수님이 계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 섞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때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너무나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기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때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으니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신앙고백은 많습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는 그 신앙고백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받는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교회의 현장, 삶의 현장에는 그 고백에 상응하는 믿음의 실제가 보기 힘듭니다. 우리의 고백이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작동될 때 진정 우리의 고백은 유효한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돌을 옮기라고 했을 때 순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나사로를 살릴 수는 없지만 주님이 삶의 현장에서 명하시는 돌은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사로는 살려 달라고 하면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옮겨야 할 돌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