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드라마입니다. 처음에 연극을 생각할 때 제목의 고도가 한자 孤島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도는 한자가 아니고 어원이 불분명한 Godot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연극을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인 시골길에 두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고도라 불리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도를 매우 오래 기다려왔던 듯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등장하지만, 고도는 아닙니다. 두 남자는 기다림에 지쳐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러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냅니다. 이러고 있으면 뭣 하나, 돌아갈까? 하면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만 가자” “가면 안 되지”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되면, 고도가 아니라 고도가 보낸 사람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오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도 씨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과거를 잊고 똑 같은 일과 대사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마지막 대사는 “가자.” “갈 수 없어.”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참 그렇지.”하는 식의 대화가 계속 반복됩니다.

이 연극을 쓴 사뮤엘 베케트는 이를 통해서 인간이 오지 않을 희망을 붙잡고 사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이를 통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습니다. 인간은 희망으로 사는 기다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아무 것도 기다릴 것이 없을 때 인생은 무의미해 지고 허무해집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기다림, 곧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먹고 살 뿐이지 자기 인생의 변화나 꿈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 다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다린 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위로 곧 구원을 기다리다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또 과부된 지 84년이나 된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마 이 기도의 내용도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8일째 할례 받으러 성전으로 올라온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만 지나면 성탄절입니다. 언젠가부터 맞는 성탄절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탄절이 갈수록 썰렁해져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대가 없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탄절이 주는 기대나 설렘이 없습니다. 백화점이나 호텔입구마다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보다는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이미지 전략일 뿐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새벽송이라 하여 새벽에 여기저기에서 아기 예수를 맞는 찬송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이제 바쁜 도시 문화에 이런 풍습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도 성탄절은 하루 쉬거나 선물을 받는 날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탄 카드 대신 전자 메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분위기는 더 썰렁해졌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축제와 기다림이 사라진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 인생이 물질 때문에 너무 각박해졌습니다. 온 사회나 가정마다 축제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함께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이렇게 찬양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축제를 없애면 안 됩니다. 가난해도 축제가 있기에 인생이 살맛이 나는 법입니다. 이번 2010년 성탄절에는 축제의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