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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7]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관리자 2006.11.19 01:00 조회 수 : 5065 추천:33

일 년에 한 번 있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는 좀 추수감사주일은 낯설게 들리지 모릅니다. 낯설다는 표현보다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근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어 더더욱 추수에 대한 감사가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의례의 상징성으로 표현되는 상징물이 그 의미하는 내용과 일치하지 못하면 그 의식이 허식이 되고 외식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추수감사주일은 하나의 전통 속에 남아 있는 형식적 절기로 전락해 버린 느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상징물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너무 상징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추수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감사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나타난 모습이 아니라 실제 내용과 본질이 중요합니다. 추수감사절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우선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모든 절기가 다 감사의 절기입니다.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요 삶의 양식이며 신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축복을 늘 감사하는 것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신약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골3:15) 종교개혁에 큰 공헌을 세운 마틴 루터는 “기독신자와 비기독신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지나간 일을 감사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기쁘고 좋은 일도 있었지만 괴롭고 슬프고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신자와 비신자로 구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 구조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이 명예로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공적인 임무수행과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인명 구조원으로 일하면서 지금까지 목숨을 구한 사람이 몇 명이 되지?” “단 두 명뿐 이라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십년도 넘게 일한 자네가 단 두 명밖에 못 구했다구? 농담하지 말게나” 그러자 인명 구조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구해준 사람은 수도 없지, 하지만 그 후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네. 난 그 둘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지” 감사하는 자는 항상 소수인 것을 봅니다.

벌써 한 해가 기울어지고 있고 교회적으로는 다음 주가 한 회계연도를 결산하는 시간입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너무 감사한 일이 많은데도 감사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하게 지나가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를 찾아보면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었던 많은 사건 중에 한 두가지에 불과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어려운 환경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눌려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환경만 어렵지 다른 환경은 열어주신 부분이 너무 많은데도 열리지 않는 어려운 환경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 힘들었던 일, 받은 상처의 기억만 크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보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것, 채워진 것, 순탄으로 인도받은 일, 격려와 위로가 훨씬 많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우리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아침, 감사를 회복하여 우리 마음에 만족과 행복을 회복하는 시간이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