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野性)이란 말은 사전적 의미로 보면 “자연 또는 본능 그대로의 거친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 모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하였습니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에 V편대를 형성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되면서 이런 야성들이 하나둘 인위적인 보호와 조작 때문에 변형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버랜드에 있는 200kg 넘는 거구의 호랑이가 어릴 때부터 사육사가 준 우유를 먹고 자라고 또 던져주는 고기를 먹고 자라면서 우리 안에 자라다 보니 호랑이 특유의 야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무늬만 호랑이지 사실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짐승세계에 1인자의 위용과 야성미는 온데간데없이 개와 같이 놀고 오히려 원숭이나 개나 다른 동물들에게 치어 피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현상이 비단 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야성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마치 온실 속에 자란 화초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성과 개성은 많아지는데 거룩한 야성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없을 때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적으로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국민소득이 만 달러를 넘어가면서 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요지면서 오히려 영적으로는 쇠퇴하게 된 것입니다. 서구나 유럽의 기독교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축복과 안락함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거룩에 대한 열망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것은 이미 호세아 선지자가 외쳤던 말씀입니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13:5-6)

그러나 성경에서 보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교회는 야성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본대로 초대교회는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죽음의 위험, 폭력의 위험, 비난과 오해, 강도의 위험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과 여건이 초대교회의 복음전파를 가로 막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고난 앞에 맛서 싸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최대 위기가 닥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교회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온 성도가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1시간 2시간 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그들의 기도는 끝장을 내는 기도였습니다. 옥문이 열릴 때까지 기도하는 목숨 건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교회 본질이 살아 있는 야성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넘쳐났던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는 언어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물질이 없어서 못하고, 시기상조라서 못하고, 바빠서 못하고, 위험해서 못한다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너무 익숙해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모든 말들이 결국 예수는 믿지만 이왕이면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단에게 믿음을 빼앗기고 야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회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용사들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들로도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명예로도, 돈으로도 권세로도 즐거움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이었습니다.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는 주향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